성능과 취향
화려한 디스플레이와 값비싼 소자들로 치장한 럭셔리 하이엔드 오디오. 스피커는 다이아몬드가 번쩍이면서 청취자를 압도하곤 한다. 내 것이 될 수 없을 거라 생각하면 발길을 돌리지만 그 멋진 외모와 함께 뿜어내는 소리에 얻어맞은 가슴의 멍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그런 소리를 듣고 집에 오면 나의 오디오가 그렇게도 초라할 수가 없었다. 조그만 BBC 모니터 혹은 가격 대비 성능으로 유명한 북셀프들이 대부분이었던 시절이다. 그리고 대출력 트랜지스터 파워앰프지만 음색이 건조하고 질감 표현이 딱딱한 덕분에 윤기 좋은 진공관 프리앰프를 매칭해 다스리곤 했다.
하지만 음악이 항상 값비싼 하이엔드 오디오에서 항상 마음에 꼭 들게 나오는 건 아니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특정 음악에선 더할 나위 없이 싱싱한 음색에 가슴을 훅 치고 들어오는 저역이 일품이었지만 어렸을 적 즐겨 듣던 1960~70년대 록이나 포크 음악을 듣고 있으며 무기질적인 질감 표현에 더해 어떨 땐 그 당시 낮은 녹음 퀄리티가 귀를 괴롭히곤 했다. 좀 더 따뜻한 중역 표현, 그리고 보기 좀 불편한 상처는 가려줄 줄 아는 미덕이 그립기도 했다. 너무 낮은 해상도와 음색의 변이도 나를 불편하게 하지만 너무 높은 해상도에 텅 빈 중역과 금속성의 칼 같은 해상도 또한 음악 듣는 도구로서 덕목이 부족한 것은 매한가지다.
그래서인지 화려한 하이엔드 기기를 사용하다가도 어느 순간 진공관 앰프에 불을 당기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어느 정도 이상의 성능이 충족된 수준부터는 사실 성능보단 취향이 더 앞서기도 하는 것이다. 하이엔드 오디오를 써보면서도 다른 무엇보다 진공관 앰프를 꼭 하나씩은 곁에 두고 운용한 이유다. 제아무리 값비싼 하이엔드 트랜지스터 앰프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값 싼 진공관 앰프가 되레 내가 좋아하는, 빛나는 벨 에포크 시대의 음악 재생엔 더 적합한 소리를 들려주었기 때문이다. 그 중 기억나는 건 맨리의 일명 ‘가오리’ 인티앰프나 자디스, 프리마루나 인티앰프 그리고 캐리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캐리는 가장 최근 몇 년간 가장 오래 곁에 두었던 앰프 브랜드다. 300B 인티앰프를 수년간 곁에 두고 내 방에 들락거린 스피커와 매칭해 듣고 때론 리뷰에 활용했다. 뿐만 아니다. SLI-80Sig 같은 경우는 두세 번 정도 들였다 내치기를 반복했다. 지금도 생산되고 있는 이 앰프는 지금은 KT120, KT150 같은 출력관에 치이지만 여전히 매력적인 KT88을 활용하고 있었고 초단관에도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6922을 사용했다. 이베이에서 버글보이 같은 진공관을 구입해 바꿔 보면 음색 튜닝을 일삼던 시절이 생각난다. 과거 설계의 진공관 앰프라서 SN비나 THD 등 스펙은 떨어질지 몰라도 가격을 생각하면 여전히 매력적이다.
캐리의 세대 교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캐리 SLI-80Sig를 가지고 튜브 롤링에 빠져 있었다. 6922 초단관은 멀라드로 교체해주었고 6SN7은 음질은 물론 내구성도 뛰어난 실바니아 6SN7 GTB를 구했다. 요즘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 때문에 배송이 힘든 경우도 있어 미국 딜러에게 구입했는데 수치도 좋고 음질도 무척 좋아 만족스러웠다. 요즘 나오는 진공관 앰프들처럼 정갈한 내부 설계는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헝클어진 내부를 자랑하지만 음질적으로 강점이 있는 하드 와이어링에 겉모습도 사실 그리 볼품 없어 보이는 앰프. 하지만 오래 세월을 견디면 단종 되지 않은 모델인 만큼 저력이라는 게 있었다.
그런 캐리에서 몇 년 전 새롱운 상위 모델을 내놓았다. 사실 이미 일찍이 알고 있었지만 경험해볼 기회가 없었는데 최근 기회가 생겼다. 캐리 SLI-80Sig 앰프를 즐기던 최근 경험에 비추어보면 캐리는 진공관 앰프에 대해 오랜 시간동안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진보적인 설계 변경이나 트렌드에 대한 반영 없이 고전적인 설계를 고수해왔다. 문도르프 커패시터 등 조촐한 업그레이드 가이드를 해주는 것 정도가 특별한 점이라면 특별하다. 그렇다면 캐리는 SLI-100이라는 SLI-80의 상위 버전을 출시할 뚜렷한 동기가 있었을 것이다. 과연 그 속내는 어떨까?
기대한 것과 다르게 이 앰프는 기본적인 설계 공식은 캐리 SLI-80Sig과 그 궤를 같이 한다. 뭔가 드라마틱하거나 혁신적인 설계 기법은 표면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여러 면에서 상위 신형 앰프임을 천명하고 있다. 일단 입력, 초단관에 여전히 6922을 사용하고 있다. 최근엔 거의 12AX7 계열의 쌍삼극관을 사용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개인적으로는 6922가 잡음이 좀 더 있지만 중역대 충실도나 진한 맛이 좋아 선호하는 편이다. 한편 드라이버/위상 반전으로 6SN7을 사용한다. 이 또한 기존과 동일하다. 하지만 별도의 정류관 없이 출력관으로 KT150을 사용하고 있다. KT88에서 KT120도 건너뛰고 바로 KT150을 사용한 것.
캐리는 SLI-100에 이 늠름해 보이는 KT150을 채널당 두 알씩 사용해 푸쉬풀 구동하는 설계를 구사했다. 출력은 무려 채널당 100와트로서 진공관 앰프치곤 상당히 고출력이라고 볼 수 있다. 증폭 방식은 클래스 AB를 채택하고 있으며 기존 캐리 앰프와 달리 3극, 5극 전환 기능은 지원하지 않고 있는 점은 아쉽다. 그러나 더 높은 출력과 더 높은 SN비 등을 기대할 수 있는 KT150 출력관 및 세련되게 바뀐 전면 패널, 그리고 더 풍부해진 다양한 입/출력단 등은 기존 SLI-80Sig 시절에 비해 격세지감이라고 할만하다.
앰프 후면으로 시선을 옮기면 모든 입/출력단이 완벽하게 좌/우 대칭으로 설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내부 설계를 좌/우 대칭으로 설계해 채널 간섭을 최소화한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한편 입력 네 조에 더해 서브우퍼 출력을 지원하고 있으며 정 중앙엔 전원 인렛이 위치한다. 마지막으로 스피커 출력을 위한 바인딩포스트가 양 쪽에 한 조씩 위치하고 있다. 참고로 후면에 스피커 임피던스에 따른 임피던스 토글 스위치를 두 개 마련해놓았다. 8옴과 4옴 두 가지인데 매칭해 사용할 스피커의 임피던스를 꼭 확인하고 그에 맞게 세팅하길 권장한다.
청음
캐리 SLI-100은 기존에 시간차를 두고 여러 번 경험해보았던 SLI-80Sig와 디자인, 설계 등 모든 면에서 확실한 상위 앰프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참고로 고정 바이어스 방식이므로 동봉된 바이어스 조정기를 사용해 주기적으로 적정 바이어스(75~85mA)를 맞추주어야한다. 한편 이 모델엔 여타 캐리 앰프들과 달리 커다란 그릴을 제공하는데 진공관 보호 차원에선 필요하지만 너무 크고 무거운 편이다. 실제 청음할 땐 시각적인 심미적 요인도 있고 발열 차원에서도 그릴을 제거하고 사용하길 권한다.
이번 시청은 소스 기기로 루민 네트워크 플레이어를 사용해 타이달에서 음원을 재생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재생 소프트웨어는 ROON을 활용했다. 한편 앰프는 캐리 SLI-100, 그리고 스피커는 매지코 A1을 활용했다. 1.1인치 베릴륨 트위터와 6.5인치 그래핀 나노텍 미드/베이스 우퍼를 사용한 중, 대형 북셀프 스피커다. 이전에 장시간 테스트해본 적이 있는데 임피던스가 4옴에 감도가 84dB 정도로 앰프 볼륨을 꽤 많이 먹는 타입이다. 주파수 대역은 35Hz에서 50kHz로 북셀프 치곤 광대역까지 재생 가능한 고성은 2웨이 모니터라고 할 수 있다.
John Adams - Bohemian Rhapsody (Acoustic)
과거 SLI-80Sig 에 비해 가장 큰 차이점이 돋보였다. 다름아닌 포닉 노이즈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물론 감도가 상당히 낮은 매지코 A1 스피커와 매칭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무음에서 트위터 출력이 조용하다. 출력도 더 높은 앰프지만 노이즈가 거의 없어 SN비가 기존 모델 대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 존 애덤스의 보컬과 피아노 타건이 명확히 구분되어 생생하면서 상큼한 사운드를 만들어낸다. 진공관 앰프답게 보컬 억양이 각지지 않고 유연하면 무척 편안하지만 힘없이 늘어지진 않는 기세가 있다. 말랑말랑한 촉감은 역시 천상 진공관 앰프답다.
Luca Stricagnoli - Thriller
어택이 약간 느린 편이지만 힘있고 명쾌하게 뻗어나간다. 선이 굵은 편으로 엷게 날리지 않고 다소 중후한 느낌으로 묘사해준다. 시간축 특성에서 오버슛이 없이 자연스럽게 서스테인을 찍고 릴리즈 되는 모습. 따라서 너무 짜릿한 초기 어택은 부각되지 않지만 적당한 속도감을 기반으로 유연한 그루브를 만들어낸다. 조급하게 서둘러 만들어내는 소리나 쥐어짜낸 얄팍함은 찾아보기 힘들다. 되레 넉넉한 품 안에 안긴 듯 편안하고 동시에 힘 있게 질주하는 호방한 사운드가 부각된다. 첨예한 매지코에서 이런 소리를 듣는 것도 처음이다.
Fink - Trouble's what you're in (Live)
라이브 실황 중 상당히 자주 듣게 되는 녹음으로 현장의 생동감과 함께 스튜디오 녹음 대비 에너지가 듬뿍 느껴지는 곡이다. 퍼커션 어택이 강력하며 그리 느리지 않고 묵직한 힘이 실려 있다. 한편 기타 스트로크는 본래 녹음 자체는 건조하게 들리기 쉽지만 약간 기름칠을 한 듯 매끄럽게 다듬어져 들린다. 청감상 건조하거나 다소 거친 녹음도 캐리 특유의 음색으로 맛깔나게 요리해주는 미덕을 갖추었다. 기분 좋은 착색이다. 하이엔드 트랜지스터 같은 입체적인 무대를 만들어내진 않지만 대신 느긋한 가운데 밀려오는 무게감이 좋다.
앨리 사라 오트/네덜란드 라디오 심포니 / 베토벤 - 피아노 협주곡 1번
피아노의 피치가 너무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다. 여러 앰프를 매칭해본 결과 A1 스피커는 차분한 대역 밸런스에 모니터에 가까운 평탄함을 깆춘 스피커인데 캐리가 여기에 생기와 함께 부드러운 촉감을 더해주는 모습이다. 피아노는 예쁘게 말아 올라가며 그 끝이 너무 뾰족하지 않게 롤-오프되는 모습이 포착된다. 무대는 요즘 하이엔드 앰프 같은 레이어링과 예리한 표현보단 약간 입체감을 누그러뜨리되 호방한 에너지를 살려내는 쪽이다. 섬세함보단 음악적 열기와 기세로 음악에 푹 빠지게 만든다.
총평
트랜지스터 앰프들의 득세 속에서 이젠 그것도 모자라 디지털 앰프 등 다양한 앰프 설계가 시대의 조류 앞에서 다양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작고 가벼우면서 다양한 소프트웨어 및 기능을 탑재하며 대중들을 유혹하고 있는 와중에 있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 오롯이 음질적으로 폐해가 없는 것인지 꼼꼼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대체로 하나는 얻으면 하나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진공관 앰프 메이커 또한 새로운 진공관 및 내부 설계의 업그레이드 및 다양한 기능 탑재를 통해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제품을 개발해내고 있다.
캐리 같은 경우 오로지 자신들이 수십 년 동안 구축해온 기술과 설계 철학을 절대적으로 고수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번에서 시청한 SLI-100은 전작들에 비해 한충 높아진 SN비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진공관 앰프의 부드러운 주파수 특성은 여전하다. 매끄러운 음촉에 특히 아련한 여운이 아름다운 배음 특성은 여전히 그들만의 것이다. 여기에 더해 매지코 A1을 당당하게 드라이빙하는 힘의 원천은 고전적인 캐리 진공관 앰프 설계에서 온다. 빠른 스피드와 광대역, 입체감 위주보단 느긋한 힘과 음색 위주의 소리가 그리운 오디오파일에겐 여전히 매력적으로 다가올 것이 분명하다. 특히 기존 SLI-80에서 아쉬웠던 부분을 온전히 해소해준 제품이다. SLI-100은 미국 진공관 앰프 설계의 대표 주자 캐리의 건재함을 증명해준 작품으로서 또 하나의 진공관 앰프 명품의 탄생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