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art. 1
CD에서 SACD까지, 디지털 오디오의 모든 것을 내 손으로.
스위스 출신의 엔지니어인 안드레아 코흐는 디지털 신호처리 분야에서 세계적인 수준의 전문가이다. 1956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부터 기계를 다루는 능력이 남달랐다. 어린 시절부터 소위 만지작거리는 일에는 꽤나 재능이 뛰어나서 수많은 취미를 즐겼다. 갖고 놀던 대부분의 장난감(?)이 기계와 전자 제품들이었으니 어떤 성향의 아이였는지는 금방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코흐 본인은 일반적인 아이들과 달리 기계나 전자 제품들을 뜯고 조립하는 것처럼 매우 정밀한 작업이 요구되는 일들에서 스스로 해내는 큰 성취감과 재미를 느꼈었다고 설명했다. 기계와 전자 제품 뿐만이 아니었다. 한 발 더 나아가, 음악 녹음, 피아노 연주, 사진, 전자 회로 설계, 비행기 프라모델 제작 등의 다양한 취미가 그의 유년기를 장식했다. 그의 호기심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심지어 빈티지 차량들을 복원해내는 기계 작업까지 이어져 오늘날에도 차량 복원 작업은 절대 손을 내려놓지 못하는 취미라고 밝혔다.

대부분의 오디오 전문가들이 그렇듯이 안드레아 또한 음악에 대한 열의는 상당히 높았다. 음악이 인생의 일부분이라 거침없이 말할 정도로 유년시절부터 음악 연주나 음악 감상이 생활의 일부였다. 이런 열정 덕분에 그는 전문 음악인이 아닌 이상, 대학 진학 당시 자신의 진로로 전자 공학을 선택했으며, 음악을 함께 다룰 수 있는 신호 처리 분야를 주 전공으로 택했다고 한다. 안드레아 코흐는 취리히 연방 공과 대학교(Swiss institute of Technology in Zurich) 출신으로 로잔 연방 공과 대학과 더불어 유럽의 MIT라 불리우는 명문 대학 출신이다. 아인슈타인이나 폰 노이만 같은 세계적 과학계 석학들을 배출한 명문으로 스마트한 그의 어릴 적 재능이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스튜디오의 녹음, 편집, 재생의 레퍼런스, 스튜더와의 만남
전자공학을 배우며 디지털 신호 처리를 주 전공으로 삼은 덕분에 대학 시절 동안 스위스의 프로용 음향 기기 전문 업체로 세계적 명성을 자랑하는 스튜더를 자주 방문했다고 한다.
당시 스위스의 스튜더/레복스는 당시 세계적 명성을 자랑하는 레코더, 믹서 그리고 모니터링 시스템의 대명사였다. 스튜더가 학교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위치하여 있었기 때문에 마치 내 집 드나들듯이 스튜더를 자주 찾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어떻게 하면 스튜더에서 일을 할 수 있을까하는 기대와 고민이 많았었는데, 학생들을 대상으로 스튜더 본사와 공장을 투어하는 프로그램이 있어서 이에 응모하여 스튜더와의 관계를 처음 맺었다고 한다. 기술에 뛰어난 그의 재능 덕분에 이를 알아본 스튜더는 그에게 자주 방문할 기회를 만들어주었고, 자주 스튜더를 드나들면서 회사의 여러 엔지니어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한다.
나중에는 스튜더의 창업자이자 엔지니어였던 빌리 스튜더와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까지 갖게 될 정도였다고 하니, 그의 연구와 개발에 대한 집념과 재능이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디지털 오디오라는 블루오션의 파이오니어가 되다
안드레아가 한창 대학을 다니며 스튜더를 드나들던 시절은 1980년에 접어들던 시기였다. 눈치가 빠른 오디오파일이라면 곧바로 CD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1980년은 70년대부터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한 디지털 오디오 녹음과 재생의 시대가 본격적인 시장으로 열리는 시기였다. 이때 안드레아가 대학에서 주 전공으로 공부하던 분야가 디지털 신호처리였으며, 그는 졸업 논문으로 고속 신호 처리 알고리듬을 주제로 연구 중이었다. 당연히 그가 스튜더를 자주 방문하던 이유 중 하나는 실제 디지털 신호를 다루고 제품을 만드는 스튜더에서 뭔가 깊은 가르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그의 기대와 달리 매번 스튜더를 방문할 때마다 오히려 본인이 스튜더의 엔지니어들에게 고속 디지털 신호 처리 알고리듬에 대한 원리를 강의처럼 떠드는 결과가 되어 버렸다고 한다. 그런 나날들이 지나가면서 당연히 스튜더는 안드레아의 디지털 신호 처리에 대한 재능을 파악하여, 스튜더의 엔지니어로 입사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이때는 아직 졸업을 하지도 않은 대학생의 신분이었음에도 말이다. 그 만큼 안드레아의 DSP와 알고리듬 설계 능력은 탁월했던 것이다. 당연히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안드레아는 스튜더에 입사하여 첫 직장으로 그리고 디지털 엔지니어로서의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세계 최초의 비동기식 디지털 오디오 샘플레이트 컨버터 개발
스튜더 레복스의 프로페셔널 오디오 부문 회사인 스튜더에서 정직원으로서의 업무를 시작한 것은 1982년이었다. 입사 후 참여한 개발 업무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비동기식 샘플레이트 변환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디지털 신호 처리 분야의 해박한 지식과 재능을 갖춘 안드레아는 샘플레이트 변환 알고리듬 뿐만 아니라 디지털 녹음 및 재생에서 사용되는 각종 디지털 노이즈 제거 알고리듬의 개발을 담당했다. 이런 업무는 그가 대학에서 주전공으로 연구하던 과제와 똑같은 분야로 그가 지닌 지식이 그대로 업무에 100% 투입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가 이런 신호 처리 알고리듬 개발 업무를 맡은 이유는 개발 기술들이 모두 음악을 다룰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1980년대 초반이라는 시대적 상황은 아직 디지털 오디오의 대중화되기 이전의 시절이였기 때문에 DSP와 신호 처리의 실용적 기술들이 상용화되기 전이었다. 따라서, 기존에 없던 디지털 녹음이나 재생을 위한 어떤 기능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모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직접 개발하여 만들어서 사용해야만 했다. 이런 개발 작업은 맨 땅에 헤딩하는 도전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스튜더는 디지털 오디오 분야에서 가장 앞선 업체이자 기술 전문 집단이었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가능했었다.
한편, 첫 직장에서의 급여는 꽤 적은 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스튜더에 다녔지만, 정작 스튜더의 홈오디오 브랜드인 레복스의 하이파이 오디오는 살 엄두도 내지 못했다고 한다. 대신 레복스의 턴테이블 구하고 나중에는 레복스의 스피커까지 구해서 쓸 수 있게 되었는데, 둘 다 회사에서 개발 장비로 사용했던 것들을 저렴하게 얻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래도 앰프까지 살 여유는 없어서 당시 첫 인티 앰프로 럭스만의 인티 앰프를 구해 본인 스스로의 첫 하이파이 오디오 시스템을 완성했다고 한다.
시대를 앞서간 1비트 오디오의 연구
스튜더에서 안드레아가 개발한 세계 최초의 완전 비동기식 디지털 오디오 샘플 레이트 컨버터가 정식 제품으로 발매된 것은 1984년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샘플레이트 컨버터는 DSD의 원론적 기술인 델타 변조 기술을 사용한 신호 변환 시스템이었다. 즉, 입력된 PCM 신호를 델타 변조를 통해 DSD와 같은 1비트 신호로 만들고 다시 이를 원하는 샘플레이트의 PCM 신호로 바꾸는 변환 시스템이었다. 이미 이때부터 안드레아는 1비트 오디오 신호 재생의 아이디어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개발된 기술은 특허로 등록되었다.
샘플레이트 컨버터에 이어 1984년에는 디지털 오디오 신호 압축 및 해제에 필요한 디지털 필터 뱅크 기술을 개발, 이를 제품화에 성공했다. 그가 개발한 첫 디지털 필터 뱅크는 디지털 오디오 신호를 주파수 대역별로 512개로 나누어 오래된 녹음들을 디지털화하면서 발생되는 디지털 노이즈 제거를 하는 데에 큰 효과를 발휘했다. 이런 디지털 필터 뱅크의 아이디어는 후일 MP3와 돌비 디지털(AC-3) 같은 디지털 오디오 압축 알고리듬의 기본 뼈대가 되는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돌비 디지털의 시발점을 만들다
이처럼 3년에 걸친 스튜더에서의 연구와 개발은 디지털 오디오에 필요한 모든 알고리듬과 하드웨어 설계 기술들을 직접 체득하고 제품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디지털 신호 처리의 뛰어난 재능을 보여준 안드레아에게 다른 업체들로부터의 제안이 들어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84년, 세계적인 음향 연구소인 미국의 돌비 연구소에서 그에게 제안이 들어왔다.
1980년대 중반에 돌비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기술을 전환하려는 단계에 있었다. 70년대에 큰 성공을 거둔 돌비 노이즈 제거 기술과 돌비 서라운드 음향 기술은 모두 아날로그 방식이었다. 이런 노이즈 제거와 멀티채널 오디오를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꾸는 것이 당면한 최대 과제였다. 아날로그 회로로 구현되어 있던 돌비의 각종 시스템들을 DSP 신호 처리 알고리듬을 통해 디지털로 동작하는 디지털 기기로 만들어야만 했다.

이 뿐만이 아니었다. 디지털 오디오 시대에 맞춰 방송국에서도 방송 시스템의 디지털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돌비는 TV 방송 전송에서 오디오를 아날로그가 아닌 디지털 오디오로 전송하고 재생하는 시스템을 개발 중이었다. 이때부터 오늘날 MP3 같은 디지털 오디오의 압축 및 해제 기술 개발이 시작되었는데, 그 업무를 맡은 것이 안드레아 코흐였다.
그가 스튜더에서 개발한 디지털 필터 뱅크 기술이 디지털 오디오 신호의 압축/해제를 다루는 원천 기술로 사용되었다. 여기에 샘플레이트 컨버터에 사용한 1비트 오디오 기술을 더해, 모든 디지털 오디오 신호를 1비트 방식의 델타 모듈레이션으로 동작하는 인코더/디코더 시스템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완제품으로 개발해냈다. 그가 미국의 돌비 연구소에서 3년 동안 개발에 매진한 끝에 완성해낸 이 시스템이 오늘날 돌비 디지털이라 부르는 디지털 서라운드 포맷의 원형이 된 ‘돌비 AC-1(Dolby Audio Codec1)’이었다(지금은 돌비 디지털이라 부르지만, 돌비 디지털의 최초 명칭은 돌비 AC-3 였다). 즉, 돌비 디지털의 코덱 기술의 뿌리가 바로 안드레아 코흐의 작품인 것이다.
돌비의 AC-1은 TV 방송 전송 시스템에 사용되는 프로페셔널용 디지털 오디오 압축 시스템으로, 돌비가 만든 최초의 디지털 오디오 기기로 방송 음향 장비업계에서 큰 판매고를 올리며 성공을 거두었다. 1986년에는 오늘날에도 폭넓게 사용 중인 돌비 디지털인 AC-3 압축 알고리듬의 원형이 되는 오디오 프로세서 장비를 직접 개발, 제작하였다.
디지털 음반 제작용 컴퓨터, 세계 최초의 디지털 오디오 워크스테이션을 만들다
3년여의 개발을 마치고 그는 모국인 스위스로 돌아왔다. 돌아온 안드레아를 제일 먼저 찾은 곳은 다름 아닌 스튜더였다. 다시 안드레아를 영입한 스튜더는 그에게 개발 팀을 꾸려주고 차세대 제품의 개발을 맡겼다. 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전 세계의 대다수 녹음들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고 있었다. 녹음 스튜디오에서 사용하던 모든 녹음, 편집 및 모니터링 장비들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격변하던 시기였던 것이다. 아직 많지 않은 디지털 녹음 전문 장비의 한계로 인해 녹음기, 믹서, 편집 장비들이 모두 제각각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혼용되어 혼란의 상태였다. 따라서, 녹음에서 최종 음반까지 전체의 시스템을 모두 디지털로 처리되는 일관된 디지털 오디오 제작 시스템이 필요했다. 안드레아는 이때 스튜더에서 디지털 멀티트랙 테이프 레코더와 하드디스크로 녹음/편집이 가능한 컴퓨터 시스템을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기획하게 되었다. 소위 오늘날 녹음 및 편집을 간단히 하나의 컴퓨터로 구현한 디지털 오디오 워크스테이션을 세계 최초로 만들게 된 것이다.

본격적인 매니저로서 그는 프로페셔널 디지털 오디오 테이프 레코더 개발의 총책임을 맡고 시스템 개발을 이끌게 되었다. 이 새로운 디지털 오디오 테이프 레코더는 48채널 DASH 포맷을 1/2인치 테이프에 담는 시스템으로 개발되었다. 2년에 걸친 연구와 개발 동안, 안드레아는 전문 녹음 장비에 하드디스크 기반의 컴퓨터 레코딩 시스템을 만드는 연구 개발 프로젝트를 기획하게 되었다. 개발과 함께 새로운 개념인 컴퓨터 레코딩 시스템에 대한 시장 개척을 함께 떠맡게 되었다. 새로운 디지털 오디오 레코더의 연구와 개발 업무는 유럽과 미국을 비롯하여 세계 유명 레코딩 스튜디오들을 찾아다니며 녹음 현장에서의 음향 처리 기술들을 샅샅히 분석하고 체험하는 기회가 되었다. 덕분에 그는 이때부터 녹음 현장에 필요한, 녹음 및 재생에 관련된 디지털 오디오 기술과 음향 기술에 대한 큰 밑바탕이 되는 실무와 이론을 동시에 체득하게 되었다.

스튜더는 프로젝트의 완성을 위해 1989년, 미국 캘리포니아에 스튜더 에디테크라는 미국내의 스튜더 연구소로 설립하고 안드레아를 그 자리에 앉혔다. 미국 스튜더에서 그는 프로페셔널 녹음 현장 및 포스트 프로세싱 작업용으로 당시로서는 초 하이엔드 사양의 신호 처리 능력을 찾춘 궁극의 하드디스크 레코더 개발을 안드레아 코흐에게 맡긴 것이다. 그는 팀을 이끌고 3년 가까운 개발 끝에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는 디지털 오디오 워크스테이션인 “Dyaxis”를 탄생시켰다. 오늘날에는 대중적인 형태의 제품이지만 당시로서는 꽤나 파격적인 디지털 오디오 워크스테이션(DAW)의 모습을 하고 하드디스크 기반의 디지털 레코딩 및 프로세싱이 가능한 놀라운 녹음 장비였다. 이후 업계에서는 ‘Dyaxis’를 흉내낸 여러 종류의 음향 장비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Dyaxis는 디지털 녹음 및 음반 제작을 하나로 통합해낸 시스템으로 디지털 음반 제작의 판도를 바꾸어 놓았다.
소니와 함께 차세대 CD를 위한 Super CD에 도전하다
1993년에는 프로용 녹음 및 방송 관련 업계에서 큰 명성을 얻게 된 안드레아를 긴급하게 찾은 곳이 있었다. 바로 CD의 창시자였던 소니였다. 80년대 말부터 시작된 20비트 이상의 고해상도 녹음 및 편집 기술의 등장은 16비트 시대에 머무른 CD 규격을 새롭게 진화시키려는 움직임이 가득했다. 소니는 CD 이후 다음 세대를 미디어를 위한 여러 기술들을 개발 중인 상태였다. 업계에서는 이런 움직임에 대해 차세대 CD를 ‘Super CD’라 불렀다. CD의 성공으로 막대한 로열티를 거머쥔 소니와 필립스를 비롯하여 수 많은 업체들이 차세대 디지털 음반 개발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세계적인 수준의 DSP 기술과 경험을 보유한 안드레아는 소니에게 가장 이상적인 해법이었다.
1993년, 소니로 스카웃된 안드레아는 플로리다에 있는 소니 음향 센터로 향했다. 그는 소니의 업무용 스튜디오용 프로페셔널 음향 장비들의 고해상도 개발을 책임지며, 다양한 믹싱 콘솔들의 개발을 이끌었다. 소니는 안드레아의 디지털 노하우가 담긴 새로운 제품들로 녹음 업계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스튜더가 그랬듯이 소니 또한 안드레아에게 소니의 녹음 장비와 디지털 프로세싱 기술 전반을 기획, 개발하는 새로운 팀으로 구축하길 제안했다. 이를 통해 안드레아는 1997년, 샌프란시스코에 새로운 소니 음향 연구소를 설립하여 신기술 개발 기획을 담당했다.

그가 샌프란시스코의 소니 음향 연구소에서 시작한 차세대 녹음 장비 개발 프로젝트는 다름아닌 오늘날 SACD를 만들게 해준 SACD 녹음 제작 시스템인 ‘소노마(Sonoma)’ 였다. 안드레아 코흐가 진두지휘한 세계 최초의 8채널 DSD 녹음/편집/믹싱을 갖춘 SACD를 위한 DSD 방식의 디지털 오디오 워크스테이션 프로젝트인 소노마는 CD의 시대를 넘어, 차세대 고해상도 녹음 및 고해상도 음반을 위해 소니가 전사적으로 도전한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PCM이 아닌 1비트 방식의 DSD 시스템인 소노마는 A/D 컨버터 및 D/A 컨버터의 모든 디지털 회로와 신호 처리 알고리듬이 담긴 프로세싱까지 모든 개발이 안드레아 코흐에게 집중되었다. 그는 DSD가 CD를 뛰어넘는 SACD를 위한 훌륭한 오디오 포맷이 될 수 있도록 아날로그와 다를 바 없는 디지털 신호를 만들고 재생하는 데에 전력투구를 했다. 1차 개발이 완료된 8채널의 소노마 시스템 프로젝트에 이어 소노마를 1대의 PC에서 32채널의 DSD 워크스테이션으로 만드는 것이 2차 프로젝트로 진행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소니와 함께 SACD 개발에 뛰어든 만든 필립스와 함께 팀을 이뤄 SACD의 표준 규격을 만들기 위한 SACD 표준화 위원회에 직접 참여했다.

SACD 표준화와 소노마 확장 프로젝트에서는 그가 오늘날의 플레이백 디자인스로 이어지도록 만들어준 계기가 된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바로 에드 마이트너였다. 에드 마이트너는 프로페셔널 녹음 시스템 개발 경력을 지닌 엔지니어로 1998년 자신의 이름을 넣은 음향 기기 개발 업체인 EMM LABS를 설립한 상태였다. 당시 안드레아가 개발한 디지털 알고리듬과 회로를 기반으로 A/D 컨버터와 D/A 컨버터 하드웨어의 제작을 맡은 것이 에드 마이트너였다. 소노마를 위한 녹음용 컨버터의 개발에서 협업을 하게 된 두 사람은 이후 SACD가 독자적인 포맷으로 홍보 및 마케팅을 하는 이벤트에 항상 함께 다니게 되었다. 그러면서 90년대말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당시 가장 업계에서 뜨거웠던 주제인 ‘DVD-Audio vs SACD’ 그리고 ‘PCM vs DSD’의 전쟁터에서 안드레아 코흐와 에드 마이트너는 DSD의 전도사 역할을 하며 기술적 장점과 우월성을 설파했다.